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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zine

화두 소통, 불행한 시대의 종말을 위하여

- 문제는 소통이 아니라 고집 -

소통은 좋은 것이지만 소통을 하자고 하는 상태는 아주 안좋은 상태다.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가 '소통'이라 한다. 어느 순간 피라미드의 맨 위에서 '소통'을 찾자마자 모든 세계가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소통'이 안되서 이 난리가 난 것일까? 왜 '소통'이 안되는 걸까?

이 시대의 불행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지 못하는데 있다. 서로가 말하고 그 말을 들어 의미를 이해하는 당연한 작업이 이뤄지질 않는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몇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한쪽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을 때다. 사장이 대화가 시작하자마자 직원의 말이 틀렸다고 얘기하고 '거부'하는 '고집'을 피우면,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직원의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대부분 직원들은 두번 다시 이야길 꺼내지 않을 거다. 

두번째, 서로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다. 자신의 이론이 맞고 상대는 틀리다고 생각하면 토론을 백날해야 결론이 나질 않는다. 자신의 이론이 틀렸다고 자존심이 뭉개진다고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게 된다. 상대의 맞는 논리를 '거부'하는데 무슨 소통이 되겠는가? 토론은 증거로써 논리의 승패, 또는 최선의 방안이 나오는데 처음부터 자신이 옳다는 전제를 깔고가면 상대에게 유리한 증거들은 거부부터 하게 된다. 


셋째, 믿음은 모든 논리를 물거품으로 만든다. 신을 매개체로 삼든 육체적 관계나 인간적인 본능을 이유로 하든, 믿음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린다. '믿음'이 기준이 되면 '유지'하기 위해 '과학'과 '논리'를 거부하게 된다. '과학'으로 종교를 증명하려는 모든 노력은 중지되야 한다. 애초에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시대의 화두 '소통'은 그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던지 간에 문제가 많다. 처음에는 한쪽이 못 알아 듣는게 문제였는데, 하두 우겨대니 집단적으로 진실을 의심하는 지경이다. 게다가 거짓 믿음이 기반이 되어 바로잡을 방법도 없다. 

소통이 화두로 떠올랐던 얼마전으로 돌아가 보자. 2008년 광우병 파동 때 일이다. 한미FTA를 추진하기 위해 그 전 해에 스크린쿼터를 양보했었다.(미국의 압력-무역불공정시비) 달라진 것은 정권이 바뀐 것 뿐이다. 마봉춘이 때마침 일침을 놓긴 했지만 이전에 광우병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던 젊은 세대의 거부감은 극에 달했다. 

불행은 이후에 일어났다. "거부"를 "반항"이라고 해석한 위정자들의 폭력이 시작됐다. 농림수산부 장관의 대처는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신문은 거짓 정보만 실었다. 자신들이 불과 몇해전에 주장했던 '글'을 지우지도 않고 천연덕스런 거짓을 늘어 놓았다. 거짓말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 불행한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차라리 솔직했다면 쉽게 끝났을 일이다. "우리가 힘이 없으니 저들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한다"고 했으면 누가 '거부'할 수 있었을까? 말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됐으니 논리적인 결과를 믿으라고 했으면서 정작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만 보여줬다. 그리고 이제 다시 똑같은 행동이 반복되려 한다. 일본, 호주 그 어떤 나라도 '설득'하지 못한 미국이 30개월 이상 소도 수입하라고 요구한다. 망한 자국 자동차사를 살리기 위해 쿼터제를 도입하라고 할지도 모른다.

소통을 거부한 채 일을 추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정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유로 경제적 이득을 포기해야 하는데 밝히면 비난이 쏟아질 것은 자명한 일이니 말이다. 위정자들은 그걸 백성들이 모를거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소통이 되질 않는다. 물론 정책 당국자들이 확실히 밝히지 않는 한 명확한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추를 못할리도 없고 수없이 많은 현자들이 입을 다물고만 있을리도 없다. 위정자들은 자신들이 대하는 백성들이 500년전의 무지한 평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소통'을 할 수 있다.

정치적 결단을 내리는 것은 '불통'이 불가피하다. 국가를 운영하는데 '소통'만으로 이끌어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불통'이 주가 되서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말이 안통하는데 누가 그 정책을 지지하겠는가? 예를 들어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를 보자. 바보가 아니라면 두가지 사업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를 표절하고 두 마디가 다르니 다른 곡이라고 말하는 작곡자같은 것이 작금의 MB 정부다. 문제는 머리 하나가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참모들이다. 

이번에 새로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내정된 정진석씨는 '4대강사업 현장에서 피켓 들고 읏샤읏샤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소수다'(경향신문 7월 14일자)라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4대강사업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애초에 '한반도 대운하'가 아니었으면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개념'이다.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없는 사업에 예산을 때려넣는게 정상적인가? 비정상적인 주장에 반대하면 소수니까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소통'이 이뤄질까!

소통은 일상이다. 소통은 필요하다고 주장하건 아니건 일어나는 일이다. 서로에게 진실이 있고 진실을 받아들일 의지만 있으면 된다. 상대의 진심을 이해하고 논리와 증거로만 주장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고집을 피우지 않으면 소통은 이뤄진다.

'소통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시대는 불행하다. 고집, 아집, 믿음, 비논리적 사고, 빈약한 증거들로 세상이 꾸려지고 있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시대가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소통이란 단어가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와야 우리가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