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의 자전적 소설 ‘푸르른 틈새’에 대해 대중문학평론가 정여울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이야기꾼의 수사학과 에세이스트의 통찰을 동시에 작동시키며 특유의 서사/서술적 공간을 창출해내고 있다. 이는 ‘서사를 뛰어넘는 서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 특유의 글쓰기 방식이기도 하다.”(정여울,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이는 묘사와 서사적인 부분에 머무는 소설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에 에세이를 가미해 작가의 철학과 통찰을 같이 보여주는 글쓰기 방식이라는 얘기죠.
이런 예를 잘 보여주는 장면의 하나로 정여울은 ‘자기소개’에 대한 장면을 꼽았습니다. 권여선이 대학시절 누구나 경험하는 자기소개의 장면을 ‘괴로움’의 경험으로 나타내며 감정적 묘사보다 에세이적 통찰로 그렸다고 말합니다.
“주로 타인의 발음을 통해서만 귀에 익은 내 이름을 직접 내 입으로 말하고 소개하는 것은 낯설고 계면쩍은 경험이었다.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듣는 청중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
(권여선, [푸르른 틈새] P22~23)
이 글을 보니 대학시설, 아니 그 전부터 자기소개하기는 계속 따라다녀왔더군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자기소개의 중심이 성적이었죠. 주변 어른들이 물어보는 관심사는 이름 다음에 “반에서 몇 등하니?”가 레퍼토리였으니까요. 잘 모르는 분이면 그냥 상위권 정도로 둘러대는 경우도 많았죠.
가끔 학교캠프나 성당에 가면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게임을 통한 자기소개도 있었네요. “아싸~ 반도패션”, “아싸~ 떡볶이”, “아싸~오랑우탄”, “아싸~...”로 자기 캐릭터를 돌려서 말하던 게임의 기억이 가물가물~.
대학교로 넘어가면서부터 자기소개는 약간 긴장됩니다. 첫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어김없이 하던 자기소개. 자신을 소개할 시간이 다가오면 조금 고민되기 시작합니다. ‘뭐라고 할까. 웃길까. 아님 진지하게 말할까. 그것도 아니면 대충 나이하고 이름만 댈까.’ 초반부터 자신을 어필하려면 조금 튀는 행동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때부터 선배들은 후배들의 성격을 규정 짓기 시작합니다. 본인도 자신을 소개한 것에 맞춰 약간의 ‘오버스런’ 학교생활을 시작하곤 하죠. 권여선의 말처럼 ‘조금은 작위적이고 폭력적인 괴로운 시간’의 신입생 자기소개가 자신의 성격을 개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대학시절이 지나면 자기소개는 밥벌이를 위한 첫 관문입니다. 직업을 찾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고 면접을 위한 자기소개도 준비합니다. 자신에 대한 약간의 과장은 밥벌이를 위해 필요한 절차입니다. 취업이 힘들어지면 약간의 과장은 보다 적극적인 과장으로 강도를 높입니다.
자기소개 ‘오버’의 백미는 연애로 넘어갑니다. 처음부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섣부른 연애 초보자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충고가 귓가에 맴돕니다. 어떻게든 다음 만날 약속을 받기 위해 약간의 과장, 또는 내숭의 한계를 넘는 매너의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연애를 위한 자기소개는 치장을 위한 가장 과장된 장면을 연출합니다. 연애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가르쳐준 대로 말이죠. 몇 번의 만남 이후에도 자신의 솔직함을 알리는 것은 꽤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오래된 연인이라도 여전히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는 인색하죠.
이제부터 계속된 자기소개와의 싸움입니다. 직장을 들어가서도 주변인들에게 취직할 때보다 더욱 강도 높은 자기 과시를 섞은 소개를 합니다. 첫 연애에 실패해 다른 이를 만날 때도 실패를 피하기 위해 더욱 과장된 자기소개를 하죠. 실패하지 않기 위한 자기소개의 굴레는 더욱 강도를 높여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인물을 만들기도 합니다. 가끔 내가 어떤 인물인지 깜빡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군요.
대학시절 풋풋했던 자기소개에서부터 직장을 얻기 위한, 연애를 위한, 사회생활을 위한, 친구사귀기를 위한 자기소개는 조금씩 사회가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소개가 됩니다. 거기다 자신의 속내를 상대방이 알아채는 것만큼 난처한 경우가 없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상대를 떠보는 일은 오랜 인간관계의 관습처럼 돼 있죠. 여기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순진한 속내를 보여주는 날에서는 꼼짝없이 바보처럼 철없는 사람으로 낙인됩니다.
자기소개하기, 잠시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죠?
계속되는 자기소개의 포장은 본인 스스로도 정말 그런 인물로 착각하게 만들진 않는지 생각해 볼일입니다.
나는 나를 제대로 밝힌 적이 있는지, 나를 찾고 들여다보는 지난한 시간의 경험을 하고 있는지, 자기소개를 위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렵긴 합니다.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지만 모험 삼아 바보가 돼 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이는 바보 캐릭터로 대통령도 됐는걸요. 순수한 자기소개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바로 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습니다.
알게 모르게 당신 주변인들도 약간은 어리석고, 바보 같은 당신의 자기소개를 더 기다리고 그리워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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